오늘 피에로는
조선의 국왕과 왕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국립 고궁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국립 고궁박물관은
총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 전시실에서는 황제국을 선포하고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조선의 모습을,
2층 전시실에는 조선왕조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상징물과 기록물
그리고 조선 5대 궁궐의 역사와
왕실 가족들의 생활 모습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로
꾸며져 있습니다.
지하 전시실에는 조선 왕실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과 궁중서화,
왕실의 의례를 살펴볼 수 있고
또한 조선의 수준 높은 과학 문화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전시실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피에로는 국립 고궁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
지하철 3호선을 이용했습니다.
경복궁역 승강장입니다.
마치 박물관을 연상시킵니다.^^
한층 올라오니
서울교통공사 상설 전시장이 있습니다.
지금은 2018년
지하철 사진전 출품사진에
전시되어 있네요.
피에로는 긴 지하통로를 따라
5번 출구를 향합니다.
마치 갤러리를 보는 듯 통로에는
전시물이 가득합니다.
국립 고궁박물관 입구입니다.
계단을 오르니 2층입니다.
이곳은 조선의 국왕과 궁궐,
왕실의 생활과 상설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조선의 국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에서
국왕은 ‘하늘의 명(天命)을 받은
초월적 존재’로 정의되었습니다.
국왕은 즉위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각종 상징물 속에 둘러싸여
의례를 행하면서 지존의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였으며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였습니다.
조선왕조는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답니다.
조선의 궁궐은 중심에
국가적 행사를 거행하고
국정을 논의하는 건물인
정전과 편전을 두고,
조정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을 배치하였습니다.
뒤쪽으로는 왕과 왕비의
취침 공간인 침전이,
동쪽에는 세자가 기거하는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건축물은 목조 구조에 기와를 얹었으며,
실내의 바닥은 정전과 편전의 경우
전돌 또는 마루를 깔고
취침 공간의 경우에는
온돌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건물 외부는 왕의 권위와 존엄을
드러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색상과
길상(吉祥) 문양을 이용한
단청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왕실의 생활에 대에서 알아보면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였던
물품들은 격조 높은 왕실의
생활상과 문화를 잘 보여줍니다.
국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을 위해
만든 의복과 음식, 각종 기물 등은
당대 최고의 장인에 의해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사치를 금하고
국왕이 몸소 검약한 생활을
실천했기 때문에 궁중의 생활 물품에는
눈을 사로잡는 화려함보다는
우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곳은 특별전시실로
조선의 공신에 대한 전시 중입니다.
공신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왕실의 안녕을 위해
공을 세운 사람에게 국왕이
내린 칭호입니다.
오랜 세월 가문에서 소중히 간직했던
유물을 기증, 기탁해주신 분들 덕분에
특별전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1층으로 내려갑니다.
1층 전시실에는
중앙의 어차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로
사회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즉위한 고종은 1875년의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개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80년 외교, 통상업무를
강화하고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화를 주도하였습니다.
고종은 대내외에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알리고
대제국의 건설을 이룩하기 위하여,
1897년 연호(年號)를 ‘광무(光武)’,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면에서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일본, 미국, 유럽을 통해
전기, 철도, 우편 등의 신기술과
문화가 유입되었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으나
대한제국기의 이러한 경험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적 자긍심을 유지하고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피에로는 지하 1층 전시실로 내려갑니다.
중앙에는 크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궁중서화와 왕실의례
그리고 과학문화에 대한 전시실입니다.
궁중서화는 국가 통치에 활용하기 위해
제작되어 특정한 쓰임새와 형식을
가졌습니다.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은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진전(眞殿)에 모셔져
제향(祭享)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 장면이나
의례의 정확한 법식을 기록화로 남겨
후대에 참조하도록 하였으며,
왕실 권위에 걸맞은 소재의 그림으로
궁궐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궁중서화는 회화 전담 부서였던
도화서(圖畵署) 소속 화원(畵員)들이
그렸습니다.
한편으로, 왕이나 종친 등이
자기표현과 수양을 위해
서화 작품을 제작하고 감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왕실의례에 대해서 살펴보면
유교를 통치철학으로 한 조선은
‘예禮’를 기초로 사회질서를 지키면서
백성과 즐겁게 화합하고자 하였습니다.
국왕은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5가지로 예제를 정비해
왕실의 정치적 권위와 정통성을
확립하였습니다.
더불어 일생 동안 단계에 맞는
예를 행하고 효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과학문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시대에 과학은
통치자의 정당성을 보이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수단이었습니다.
국왕은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해
과학기술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고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천문(天文)을 살피고
역법(曆法)을 정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의 첫째가는 의무였습니다.
나라 경제의 근본인 농업의 발전을 위해
기상(氣象), 측량(測量), 농법 등에 대한
연구에 힘써 조선 풍토에 맞는
농사기술을 개발하고
각종 관측기구를 발명하였습니다.
의학 분야에서도
우리나라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법을 개발하였고,
국방력 강화를 위해
무기 제조기술도 혁신하였습니다.
과학문화전시실 옆으로
고궁 배움터라고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네요.
기증도서를 모아둔 공간도 있습니다.
다시 2층으로 올라왔습니다.
아이들이 스탬프를 찍느라
집중합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국왕과 왕실의
역사여행을 마친 피에로는
다시 지하철역을 향합니다.
태양의 열기가
점점 더해지는 6월 초여름입니다.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국립 고궁박물관으로의
역사여행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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